「인커밍」봄호 (기고 3) 김수영과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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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과 기본소득
- ‘이만하면’이라는 중간사(中間辭) 이 글은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2023년 8월)
‘기본소득과 문학’ 세션에 제출한 원고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서울대 영문과 교수
나는 기본소득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상대방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한 경험이 있다. 상대방은 기본소득이 비현실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그는 나를 비웃은 게 아니었다. 그가 비웃은 것은 기본소득이었고, 그는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며 그 조소에 동의할 거라 믿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려야 했다. 우리 사이에는 각자의 믿음이 있을 뿐 공유된 진실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우리가 다시 기본소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이 글이 하나의 서론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김수영의 시 한 편으로 시작해 보려 한다. 아래에 소개할 「이혼 취소」의 탈고일은 1966년 1월 29일로 돼 있지만 발표 지면은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다. 3년 동안 서랍 속에 있다가 김수영 사후(死後)에 유고 게재 형식으로 뒤늦게 발표됐다. 김수영 연구의 호황 속에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은 바 없는 작품이다. 나는 이 시에 김수영의 본질 중 하나가 잘 담겨 있다고, 또 그게 기본소득과도 조금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별거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고 6부 이자로 10만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10만원 중에서 5만원만 줄까 3만원만 줄까
하고 망설였지 당신보다도 내가 더 망설였지
5만원을 무이자로 돌려보려고
피를 안 흘리려고 생전 처음으로 돈 가진 친구한테
정식으로 돈을 꾸러 가서 안 됐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이것을
하고 피를 안 흘리려고
피를 흘리되 조금 쉽게 흘리려고
저것을 하고 이짓을 하고 저짓을 하고
이것을 하고
그러다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
나이 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았지
그 편지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를 감동을 하고
읽었지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그러나 완성하진 못했지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한
천사 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에는
중립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 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이혼을 취소하자
* “영문으로 쓴 블레이크의 시를 나는 이렇게 서투르게 의역했다 —
‘상대방**’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자신이 선(善)의 입구에 와 있는 줄 알아라.”(원주)
** 상대방은 곧 미망인이다. (원주)
― 「이혼 취소」 전문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언젠가 화자가 아내 몰래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증을 섰던 모양인데, 그게 잘못되어 결국 빚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선을 행하고자 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선이 아니라 돈이 문제인 상황이다. 그는 제 몫의 책임을 줄여보려고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자가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다는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을 인지하고 징그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 마침 후배 시인이 보내온 편지에는 마치 그를 위해 쓰인 듯한 시구절이 인용돼 있다.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 실행되지 않은 상태로 욕망을 품느니(키우느니) 요람 속의 아이를 죽이는 것이 낫다. 즉, 실현되지 않을 욕망은 아예 처음부터 그 싹을 잘라서 회한이나 미련으로 남을 가능성을 제거하라는 뜻이리라. 블레이크, 「지옥의 잠언」(the proverbs of hell)의 한 구절. 이 구절을 읽고 김수영은 돈을 아껴보려는 제 욕망을 빨리 포기했던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그러나 완성하진 못했지.”
그는 하지 못했다. “피”를 안 흘리거나, 흘려도 “조금 쉽게” 흘리려 했다. 그러는 동안 죽은 친구의 아내를 향한 선한 연민은 어느새 (제 결정에 대한) 후회와 (친구의 아내에 대한) 원망과 (경제적 손실에 대한) 불만으로 바뀌어 있었고 말이다. 말하자면 블레이크의 지혜를 이해는 했으나 실천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아내의 결단 덕분에 화자도 그 지혜를 ‘완성’할 수 있게 됐다. 놀랍게도 아내는, 이혼은 이혼대로 하되, 남편의 빚은 끝까지 같이 해결하기로 결단했으니까 말이다. 공동 자산인 집을 담보로 잡고 빚을 내자는 것. 어차피 지게 된 빚이라면 마땅히 갚아야 하며 여기에는 어떠한 얄팍한 계산도 뒤따라선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화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내가 기꺼이 피를 흘리려 한 덕분에 그도 요람에서 살아남은 제 욕망을 뒤늦게 살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이제 김수영은 누구든 당당히 욕할 수 있다. 선을 말하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예컨대 “천사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을 실천해본 것 같지는 않은 어느 작가를 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경험은 다음과 같은 도덕철학적 명제를 낳는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에는
중립이 없다
화자는 애초 선을 행하려 했으나, “선의 입구”에서는 조금의 선만을 행하려 했다. 그렇게 행해진 선은 ‘조금의 선’만이라도 되는가? 김수영에 따르면 그건 그냥 악이다. 어떠한 계산과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에 언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라고 대답한 어느 문인에게 분개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김수영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적어도 언론 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김수영, 「창작 자유의 조건」,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241쪽. “중간사”라는 개념의 학문적 출처를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언론 자유는 ‘있느냐 없느냐’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은 6년 뒤에 쓰인 위의 시에서 같은 논리를 변주하고 있다. 이번에는 언론 자유가 아니라 선의 실행과 관련해서다. 선의 실천이라는 영역에서도 ‘이만하면’이라는 ‘중간사’(위 시에는 ‘중립’이라는 단어를 썼지만)는 있을 수 없다. 선에 대한 추구가 절대적이지 않을 때 그것은 ‘이만하면 선’인 것이 아니라 그냥 ‘악’이다. 왜 그게 ‘악’씩이나 되는가. ‘이만하면’이라고 말하는 순간 선의 대상은 소외되고 주체는 너무 쉽게 자기 긍정에 이른다. 그것은 이중의 과오다.
*
“이만하면”이 없는 절대적인 선,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어렵지만 사회적으로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공적인 선(공공선)의 영역에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두 종류의 권리, 자유권(Civil-political rights)과 사회권(Social-economic rights)에 대한 인식 격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체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언론과 집회와 시위와 결사의 자유 등은 말 그대로 자유권이다. 군부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어렵게 획득한 이 자유권에 대해서 우리 대부분은 권리의 백 퍼센트 보장을 당연시하고 거기엔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입장을 갖는다. 문제는 자유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추가로 확보되어야 ‘인간다운 삶’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진다. 육아, 교육, 주택, 의료 등에 대한 권리, 이를 통칭하여 사회권이라고 한다. 사회권에 대한 국제적 규약이 있으며(대한민국도 1990년에 가입했다), 그 규약의 이행 여부를 유엔 사회권 위원회가 감시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자유권에 대한 인식과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입장이 아니다. 헌법에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지닌다”(헌법 34조)라고 규정돼 있지만 이를 근거로 국가의 사회권 침해를 인정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째서 그런가.
사회권이 완전히 보장된 상태를 기준으로 현재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보장돼 있지 않던 때를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태도는 다음과 같은 상투적인 발화를 낳는다. “어떻게 모든 게 완벽할 수 있겠어. 그래도 이만하면 과거에 비해 나아졌잖아?” 이것은 우리 대다수에게 너무도 상식적으로 보여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김수영이 처음에 ‘이만하면’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한 대상은 언론 자유, 즉 자유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혼 취소」에서 선을 행할 때도 그래야 한다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여기서 또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공공선을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다운 삶의 보장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동시대의 다수 한국인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권을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되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자유권과 사회권에 대한 이 차별 대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에 대한 김원영의 글에서 그 단서를 발견한다. 그는 이동권이 사회권이라 생각했고 주위의 숱한 ‘이만하면’에 포위된 채 살았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깨닫는다.
“과거에는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길고 어두운 계단을 만나면 우선 나의 다리와 휠체어에 마음이 쓰였다(‘이런 젠장,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그 계단이 나의 휠체어와 다리를 붙잡고 있는 듯 느껴졌다. 구청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곳에 장애인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은 이제 구청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내 휠체어를 붙잡고 있거나 화장실 문 앞에 압정을 뿌려두고 있는 것처럼 경험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계단, 횡단보도의 높은 턱, 무심한 관료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나의 사지를 붙잡아 침대에 묶어 놓았고, 내 몸과 마음은 그토록 나를 배제하는 환경과 사람들의 무관심에 공격당했다.”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 221쪽.
사회권에 대한 자각이 필요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회권이 모두에게 ‘있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권의 온전한 보장을 지금 당장 요구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그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틈이 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위 인용문과 같은 글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글은 사회권이,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실상 자유권에 가깝다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은 ‘인지적 공감’을 위해 필요하다. 사람들은 나빠서가 아니라 몰라서 틀린다. 공감은 선천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후천적 노동의 문제다. 자료를 읽고 상상하고 비로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없으면 안 되는’ 자유권과 ‘있으면 좋은’ 사회권이라는 허구적 구별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될 것이고 다음과 같은 명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사회권은 그것이 사회권으로서 보장되려면 자유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이제 기본소득을 말할 차례다. 기본소득은 사회권이 아니라 자유권의 문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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