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 여름호 (특집) 22대 국회에 바란다 [노동과돌봄] 노동과 돌봄 패러다임의 혁신을 위한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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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I.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
바란다고 된 적은 거의 없지만, 22대 국회만큼은 다르기를 기대한다. 국정 역량을 크게 결여한 윤석열 정부가 낭비한 시간의 늪에서 빠르게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컴퓨터 정보기술혁명을 통해 자동화를 가속화했던 3차 산업혁명으로도 상당한 일자리 손실과 소득격차 확대를 경험한 바 있다. 지금은 AI가 상징하는 지능정보화 사회가 극단적인 불평등 속에 도래하는 중이다. 노동시장의 구조변화를 더욱 촉진하는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시장과 사회복지의 이중구조가 더 악화되고 노동시장 참여의 기회가 배제된 인구 규모도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 기초한 암묵적 사회계약(postwar settlement)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계약론에 대한 논의가 이미 오래 진행되어왔다. 논의의 핵심은 노동시장 지위와 상관없이 탄생부터 죽음까지 지속적인 보호를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든 노동자는 생애주기의 어떤 순간에 유급노동시간을 줄인다 해도, 혹은 돌봄 노동만을 수행한다 해도 적절한 사회적 보호와 임금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노동을 불안정한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경제 및 노동시장의 상황을 고려하여 노동정책과 복지정책이 이전보다는 훨씬 더 긴밀하게 연계되어 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및 돌봄 패러다임의 핵심은 ‘평등’이다. 저출생이 악화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현재의 일자리가 모든 시민의 노동권과 돌봄권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일과 돌봄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 곧 남성의 돌볼 수 있는 자유와 여성의 일할 수 있는 자유를 동시에 제고하는 것이 평등한 복지국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인구의 노동권 보호, 양질의 공공부문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 평생교육에 대한 투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평등한 노동조건의 확립과 보장, 기본소득 도입 등은 장기적으로 노동의 질을 제고하고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낮춰서 경제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II. 세부 과제
한 국가의 노동체제(work regime)와 돌봄체제(care regime)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장시간 노동 관행은 가사와 육아 부담이 큰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제한하며, 비정규직과 비전형 노동의 남용은 시장의 돌봄 일자리의 질을 크게 낮춘다. 이처럼 돌봄이 국가가 아닌 가족 내 여성과 불완전한 시장에 의해 주로 제공되면, 남성 역시 한 가족의 생활임금을 벌기 위해 더 장시간 일을 하며 나쁜 일자리에 매달리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법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❶ ‘노란봉투법’에서 모든 일하는 사람의 노동권 보호까지
급변하는 노동시장의 현실 속에서 기존의 법과 제도로는 보호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가 존재한다. 일자리의 외주화와 파편화가 진행되면서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노동권이 형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22대 국회는 바로 이런 모든 일하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통과되지 못한 노조법 2조는 사용자의 정의를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로 확대하고 쟁의행위의 범위도 이익분쟁뿐 아니라 권리분쟁까지 확대했다. 노조법 3조는 노동자의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손해배상을 구체적인 사유에 따라 개별적으로 정하도록 규정했다. 이 3조에는 노동자의 소득수준을 감안해 손배 청구의 상한액을 두는 안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이 개정안을 통해, 간접고용 노동자의 실질적 교섭권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플랫폼노동자와 프리랜서 등 자영업자로 오분류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여러 국가는 플랫폼노동자들을 노동자로 간주하는 판결을 내리거나 입법을 통해 플랫폼사업자의 사용자성을 폭넓게 인정한다. 예를 들어 2021년 유럽연합의 입법 지침에 따르면 총 5가지 조건 중 2개만 만족하면 사용자로 인정된다. 5가지 조건이란 보수 혹은 보수의 상한 결정, 업무성과 감독, 노동시간과 방식을 선택할 자유의 제한, 업무방식을 통제하는 규칙 제공, 고객기반 마련과 제3자를 위해 일할 가능성의 제한 등이다. 21대 국회에서 플랫폼종사자 보호와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마련되었으나 이 법안에는 노동자 추정기준이 포함되지 않았다. 플랫폼노동자만 국한하는 별도의 법 마련보다는 노동법상 노동자 기준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더불어, 오랜 기간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서 일해 온 전체 노동자의 20%에 육박하는 5인 미만 영세기업의 노동자에게도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근로기준법의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다. 또한, 지난 21대 대선에서 거의 모든 당의 후보자가 약속한 ‘모든 일하는 사람을 위한 기본법’도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❷ 육아휴직의 보편적 적용과 공보육의 양과 질 제고
한 국가의 돌봄체제는 국가·시장·가족 중 누가 주로 돌봄을 제공하는지, 관대한 가족휴직제도와 양질의 공공 돌봄서비스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제공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22대 국회는 국가의 역할을 획기적으로 확대함으로써, 가족과 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후진적인 돌봄체계를 개혁해야 한다.
육아휴직은 현재 0.6명대로 떨어지고 있는 출생률을 높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이지만 영세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1인 자영업자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다. 거의 모든 사회보험의 수혜조건이 고용, 특히 정규직 지위와 연동되어 있다. 심지어 그런 정규직조차 공공부문과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육아휴직을 쓰기 어렵다. 육아휴직의 수혜조건을 갖추지 못한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조세 또는 새로운 사회보험의 도입을 통해 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또한 남녀 합산 육아휴직 기간이 너무 길어 출산전후휴가 3개월을 포함해서 15개월까지 여성에게 사용이 집중되고 있다. 모든 국민이 이 혜택을 받을 때까지 선진국 수준으로 육아휴직 기간을 줄이고 양도 불가능한 기간을 지정해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대신 아동 돌봄이나 가족 간병을 위한 휴가 기간은 지금보다 훨씬 늘릴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공공 돌봄서비스의 양과 질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육아휴직 활용 이후에 필요한 국공립 보육시설 이용률을 70%까지 늘리는 한편, 보육인력의 전문성을 제고하여 적어도 중산층 수준에 맞춘 보육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 돌봄서비스의 파편화된 고용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지금은 재정은 정부가 지원하고 서비스제공은 모두 민간사업자가 담당하는 형태다.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귀중한 권리와 가장 기본적인 노동권이 교차하는 핵심적인 지점이다. 기존의 일자리를 그 가치에 걸맞은 적절한 임금을 받는 좋은 일자리로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해야 한다. 그래야 돌봄의 질을 높일 수 있다.
❸ 노동시간 단축: 주 4일제 도입을 위한 기반 마련
소득 불평등이 심한 국가일수록 장시간 노동과 초단시간 노동이 공존한다. 고임금 노동자는 노동 대비 여가의 기회비용이 높아 더 긴 시간을 일하게 되고, 저임금 노동자는 낮은 임금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장시간 노동해야만 한다. 성별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강고할수록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낮은데, 이 역시 남성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유도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포괄임금지급 관행과 특별연장근로제도의 남용 등 다양한 제도적 원인도 존재한다. 현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노동시간의 ‘유연하고 탄력적인 운영’(annualization)은 선진국에서 노동시간이 이미 충분히 감축된 이후 단체교섭의 방어막 하에 체계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우리 사정과는 맞지 않는다.
노동시간 단축 방안은 이러한 구조적, 제도적 요인에 대한 충분한 숙고 이후 신중하게 추진될 필요가 있다. 이미 대기업을 중심으로 주 4일제 실험이 시작되는 추세라 법정근로시간의 단축도 추진해야 한다. 이와 병행해서(가능하면 앞서서)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제한, 감시단속적 노동자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휴게·휴일적용제외 문제, 노동시간 5개 특례업종에 대한 축소·조정,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사업장 확대 적용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법정근로시간을 통해서는 규제할 수 없는 플랫폼노동자의 대기시간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 플랫폼노동자는 일을 하다가도 일감이 없어 대기하거나, 또는 일할 장소로 여기저기 이동하느라 긴 시간을 쓰게 된다. 플랫폼노동의 보상체계를 만들 때 이 시간도 노동시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계속해서 업무를 외주화하거나 정규직이 하던 업무를 독립계약자 등 종속적 자영업자에게 맡기는 관행을 확대하는 한, 법정근로시간 단축의 의의가 크게 퇴색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과로사 예방법안을 수정·보완하여 22대 국회에서 통과시킨다면 노동시간 단축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에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과로사 예방법안은 과로사의 정의를 명시하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를 명시했다는 점에서 입법의 의의가 크다. 하지만 유사한 일본 법의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더 다양한 제도적 개선방안을 포함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원하청 관계에서 발생하는 산재 및 과로사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택배 등 과로사가 특히 많이 발발하는 업종을 중심으로 원하청 노사가 모두 참여하는 업종별 과로사예방협의체 구성도 지원해야 한다.
❹ 평등한 노동시장: 성별, 고용형태별 차별 금지의 실효성 확보
노동권은 성별, 국적, 인종, 고용형태 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까지 포함해야 한다. 비록 현재의 남녀고용평등법과 비정규직 보호법이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동일하거나 유사한 업무에 종사하는 비교 대상의 남성 노동자나 정규직 노동자가 없으면 차별 시정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간접차별의 원칙은 법에만 명시되어 있을 뿐, 현실에서 적용된 예는 극히 드물다.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를 20년 가까이 실행했음에도 한국은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중 유리천장이 가장 강고한 국가로 남아있다.
22대 국회는 이런 유명무실한 차별 시정 조치를 개선하고 강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간접고용을 포함한 비정규직 사용수준을 지표화하여 공공조달과 연계시킨다면, 정부와 계약을 맺은 사기업이 불안정한 일자리의 규모를 줄이고 차별 없는 생활임금을 지급하도록 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고용차별도 유사한 방식으로 규제 가능하다. AA제도의 경우, 고용형태공시제와 연계하여 성별·고용형태별 임금수준을 집단적으로 취합한 후 성과지표뿐 아니라 인사관행과 관련한 과정지표를 모두 포함하여 규제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부진한 평가를 받은 기업은 확실히 불이익을 주도록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성가족부를 성평등부로 확대 개편하고, 부처 간 유관 업무를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위원회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경력 개발은 저출생이 유발하는 생산가능인구 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남성의 무거운 부양의 책임을 나누어 남녀 모두에게 삶을 좀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기획할 자유를 줄 수 있다.
❺ 산별교섭과 단체협약 효력확장제도를 통한 노동시장 이중구조 완화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2022년 기준 13.1%에 불과하며, 고용형태별·기업규모별 조직률 격차가 극심하여 양극화와 불평등이 악화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조직률은 2~3%에 불과하며, 300인 이상 기업의 조직률 37%에 비해 100~299인 기업은 5.7%, 30~99인 기업은 1.3%, 30명 미만 기업은 0.1%로 규모가 작을수록 조직률이 급감한다. 한국이 산별교섭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국가도 아니지만,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하는 이처럼 낮은 조직률로는 초기업 교섭으로 기대되는 순기능 특히 임금과 노동조건의 평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우선, 2010년 노동법 개정의 가장 큰 문제는 복수노조를 허용하면서도 창구 단일화를 통해 노동조합이 다양한 교섭구조를 선택할 권리를 침해했다는 점이다. 특히 교섭 단위를 사업장 안에서 결정하도록 하여 산별교섭을 형해화하고 있다. 소수노조와 산별노조의 교섭할 권리를 크게 제한하는 현재의 교섭창구 단일화제도의 폐지 혹은 개편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와 같이 조직률이 낮은 경우, 단체협약의 효력확장을 통해 산별 차원에서 합의된 내용을 해당 산업의 미조직 사업장의 노동자와 사용자에게도 확대해야 한다. 특히 원청기업에 적용되는 단체협약은 하청 소속 노동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체로 조직률과 협약 적용률은 적용률이 약간 높은 수준에서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그러나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 조직률이 낮거나 중간수준인 국가의 경우, 효력확장제도를 통해 낮은 조직률이 가져오는 문제를 최소화하고 있다.
❻ 청년층 일자리와 복지의 연계: 기본소득과 교육훈련
극단적인 양극화와 좋은 일자리 감소로 우리 사회 청년 대다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한 준비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며, 가족의 소득수준에 따른 청년 일자리 격차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청년실업과 저출생 등, 우리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여러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정 연령에 도달한 청년층에게 기본소득과 체계적인 구직지원, 양질의 직업훈련 등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LMP)를 연계해서 제공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GDP대비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총지출 수준은 2021년 기준 0.68%로, 1~2%를 지출하는 북유럽 등 선진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중에서 교육훈련에 사용되는 비중은 0.09%로, 0.3% 안팎의 덴마크나 프랑스보다 현저하게 낮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신 다른 선진국이 거의 지출하지 않는 직접 일자리 창출에 0.18%를 지출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안정한 일자리는 복지의 질 낮은 대체재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직업훈련이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 질이나 실효성에 대해 청년층의 문제 제기가 계속되는 이유이다. 청년들이 4차 산업혁명의 격랑 속에 뒤처지지 않고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정책을 동원하여 지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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