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 여름호 (인터뷰) 노서영 기본소득당 서울시당 위원장 “기본소득당의 서울시의회 진출, 이뤄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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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오준호
《인커밍》 발행인
노서영 당원의 하루는 늘 쏜살같다. 이끄는 당 사업이 여러 개다. 그는 서울시당 위원장, 당 여성위원회 ‘베이직페미’ 위원장, 청년·대학생위원회(청대위)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거기 더해 이번 당 지도부 선거에 ‘청년최고위원’으로 출마하려고 한다. 노서영 위원장을 5월 27일에 중앙당에서 만나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안녕하세요. 하는 일이 정말 많던데, 요새는 특히 무엇으로 바쁜가요?
대학생들과 ‘햇빛바람농활’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 인상 깊은 활동이 농활이었는데, 그 농활을 현재 청년·대학생위원회 운영위원들과 해보고 싶었어요. ‘햇빛연금’을 지급하는 전남 신안군으로 가기로 하여 답사도 다녀왔습니다. 농활대원을 모집하러 ‘포스터 원정대’를 수도권 12개 대학에 보내 포스터를 붙였어요. 온라인 홍보도 시작했고요. 신청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학생회 체계를 통하지 않고 모집하느라 쉽지 않을 텐데, 모이기만 하면 아주 재미있는 사업이 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일은요?
여성위원회 책모임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여성주의 신간을 읽는 ‘신간드의 모험’이란 책모임인데 「사랑을 재발명하라」(모나 숄레)를 읽었습니다. 서울시당에서 6월 초 당원 강연 사업을 준비 중이구요. 서정희 군산대 교수님을 모시고 ‘공유부 기본소득의 국내 사례’에 대해 배우려고 합니다.
‘내가 아는 세상은 반쪽짜리’라고 깨닫다
본격적인 인터뷰로 들어가서, 청소년기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꿈이 있었는지요?
어릴 때부터, 맡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초등학교에서 방송반 활동을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이어갔는데요. 제가 기획한 프로그램이나 쓴 대본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뿌듯했어요. 그러면서 PD나 방송작가를 꿈꿨죠.
서울에서 나고 자랐나요?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태어나 마포구에서 쭉 살았어요. 어릴 적엔 이사를 많이 했는데, 이전 집의 바퀴벌레가 이사할 때 옷장에 달라붙어 따라오는 바람에 제가 노이로제에 걸린 적이 있어요. 그러다가 아파트에 살게 됐고요. 요새는 강서구에서 혼자 자취를 시작했어요.
성균관대 국문과에 진학했는데, 작가나 PD 계열 진로로 가기보다는 사회참여 활동을 더 열심히 했지요?
고3 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어요. 고등학교가 세월호 분향소가 있는 광화문과 가까워서 친구들은 헌화도 하고 리본도 받아오곤 했어요. 저도 유가족들에게 공감했지만 분향소에는 가지 않았어요. 그때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말로는 사회 문제에 관심 있다고 하면서 직접 가보지는 않았구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죠. 그러다가 대학에 와서 과 선배가 제안해서 대학생 기자단 활동에 참여했어요. 기자단으로 처음 했던 활동이 굴뚝 농성을 하는 노동자를 인터뷰하는 일이었어요.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통해 잘 몰랐던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네요.
처음에는 기자단이 내 진로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이전에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었어요. 그저 헌화하러 가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 차벽을 세우고 물대포를 쏘는 걸 보면서 ‘내가 알던 세상은 반쪽짜리였다’고 깨달았죠. 기자단 활동이 계기가 되어 민중총궐기도 가고 퀴어퍼레이드도 가서 해방감을 느꼈죠.
2016년에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인터뷰를 봤어요. 무엇을 느꼈던 건가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접하고 저도 모르게 강남역으로 갔는데요. 세월호 유가족이나 노동자들과 만날 때는 제가 당사자가 아니어서 연대하는 마음으로 갔다면, 이 사건은 바로 나의 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절대 잊지 않겠고 이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내 할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포스트잇에 써서 강남역 입구에 붙였죠. 제가 국문과 학생회장이었는데 학과 내에 여성주의 책읽기 모임을 만들었어요. 이 사건 여파가 커서 성별 불문하고 많은 학우들이 과방이 꽉 찰 정도로 모여서 세미나를 했어요. 저희 과뿐 아니라 그런 모임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많은 대학생들이 페미니즘 공부를 했죠.
그런 활동을 하다 성균관대 총여학생회 재건운동을 시작했죠?
2018년에 어느 비정규직 교수님이 ‘미투운동’을 하셨어요. 당시 총학생회는 ‘학교 입장과 피해자 교수님 입장이 서로 충돌하니 총학생회는 중립을 지키겠다’ 따위의 입장을 내놓았어요. 그걸 보며 학생회가 정말 무능하다고 느껴서 저와 동료들이 ‘미투위드유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미투운동에 연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였어요. 정말 많은 학우들이 서명을 해줬어요. 이걸 기반으로 총학생회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학생회칙을 찾아보고 총여학생회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단지 회장 입후보자가 없어 선거를 치르지 못했을 뿐이었어요.
그래서 총여학생회장 후보자가 되기로 한 건가요?
예. 우선 ‘미투위드유 특별위원회’로 만난 사람들과 ‘우리 학교에 왜 총여학생회가 필요한가’를 대자보로 써서 알렸죠. 총학생회는 처음에는 총여 회장 입후보자가 나오면 선거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점점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거였어요. ‘총여학생회 회칙이 없어서 선거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회칙을 찾아 내밀었어요. 그러니까 이 회칙이 진본인지 알 수 없어서 안 된다고 해요. 그래서 총여학생회 활동하고 졸업한 선배들에게 회칙이 진본이 맞다고 확인하는 서명을 받아 제출했어요. 그랬더니 이번엔 회칙이 너무 오래됐다는 거예요.
총여학생회 재건을 막으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되네요.
결국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총여학생회 선거를 한다는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부 학생회장이 총여학생회 폐지 총투표를 발의하기 위한 연서를 받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그 연서 명단을 공개하라고 해도 개인정보니 뭐니 하며 공개하지 않았어요. 절차적인 하자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총여학생회 폐지 총투표가 열렸죠. 우리는 이것이 부당한 투표라는 점을 열심히 알렸지만, 끝내 총투표가 열려 총여학생회는 폐지됐어요. 하지만 반대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넘어선 연대를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죠.
총여학생회 재건에는 실패했지만, 2019년에 대학 연합 단체인 ‘유니브페미(univfemi)’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가 폐지되자 아무 문제 없던 다른 학교까지 총여 폐지 총투표가 벌어졌어요. ‘괜히 나서서 더 나쁜 결과를 만든 걸까’ 하는 생각으로 괴로웠죠. 제 개인정보가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인신공격이 뒤따랐죠. 같이 활동한 친구들도 공격과 조롱에 시달렸어요.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해 친구들을 모았어요. 범대학 시민단체를 만든다는 계획으로 여러 대학으로 ‘포스터 원정’을 다니며 ‘페미니스트 책모임’을 만들었죠. 그때 제가 주 3회 세미나를 했습니다. 신촌팀, 혜화팀 이런 식으로 30명을 모았고, 이들을 초동회원으로 유니브페미를 만들었습니다. 대학 내 성폭력, 성평등 같은 20대 여성의 고민에 집중해서 활동했죠.
‘나를 닮은 정당’ 기본소득당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취업을 할지 계속 사회운동을 해야 할지 실존적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실은 그 고민이 기본소득과 연결되는 지점인데요. 돈을 많이 벌려는 욕심은 없었지만, ‘내가 이러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컸죠. 그러다가 기본소득을 알게 되고, 기본소득이 있으면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면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또 한편으로 제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이 문제야, 이것을 바꿔야 해’라고 얘기했는데 해답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기본소득을 접하고서 ‘이제 대답도 가지게 됐다’고 느꼈어요. 문제를 푸는 열쇠로서 기본소득이 반가웠어요.
그래서 기본소득당이 만들어졌을 때도 자연스럽게 참여한 것인가요?
네. 저와 제 친구들을 닮은 정당을 만든다고 기대하며 기쁘게 참여했어요. 대학 안팎에서 활동해 보니, 각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는 시민단체도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을 대변하는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더라구요. 각자 현장에서 열심히 싸워도 정치가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일상으로 흩어지잖아요.
기본소득당 여성위원회 ‘베이직페미’를 만들고는 어떤 일을 했나요?
창당 초기 ‘젠더정치특별위원회’ 운영위원으로 참여했고 위원회의 위상을 높인 의제기구 ‘베이직페미’를 만들어 대표를 했어요. 2021년 말에 ‘생활동반자법 체험전’을 열어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 후 용혜인 의원이 생활동반자법을 최초 발의하면서 그 의미가 이어졌구요. 2022년 지방선거 당시 페미니스트 후보 지방선거 출정식을 하면서 ‘페미니즘은 기본이지’라는 행사를 열었어요. 다른 정당들이 성평등 이야기를 안 하는 시기에 저희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죠. 기본소득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본소득 원칙인 ‘개별성’에 성평등 철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처럼 기본소득과 성평등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선 때 유세팀장을 했죠? 대선을 20대 활동가들과 함께 만든 것이 후보인 제게도 큰 의미였는데요. 본인에겐 어떤 의미였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대선 유세팀장을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요. 남들이 이력으로 인정 안 해줘도 저는 엄청난 경험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그런데 유세를 다녀 보면 다른 선본 유세팀장이나 경찰이 다가와서 ‘유세팀장이 누구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저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안 믿더라구요. 젊은 여성 유세팀장을 본 적 없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며 제가 억세졌던 거 같아요. 또 다른 기억은 마지막 홍대 유세였어요. 선거 중간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간 격리되었는데 마음이 너무 괴로웠거든요. 격리가 끝나고, 마지막 유세는 한 몸 불살라 성공시키고 싶었어요. 많은 선본원이 지지유세를 했고, 후보님도 마지막 유세를 하는데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어요. 거대정당 후보들 유세로 시끄러운데도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우리를 비추는 것 같은 감동적인 장면이었어요.
3기 대표단 시기에는 청년대학생사업을 진행했지요. 활동 성과로 대학생 당원 숫자가 많이 늘어난 것으로 압니다. 어떤 일을 했나요?
대선과 지선을 치르고 조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고민으로 제가 조직실장을 맡았어요. 제가 잘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이 청년과 대학생이라고 판단해서 그들과 함께하는 사업을 기획했어요. 대학생들과 사회 이슈와 관련한 장소에 방문해서 보고 듣는 ‘소셜투어’ 프로그램도 했고 ‘링크로스 아카데미’라고 사회 문제에 대해 강의를 듣고 직접 캠페이너(캠페인 기획자)가 되어보는 과정도 열었죠.
이태원 참사 후 대학별로 유가족과 간담회도 열었죠?
맞아요. 이태원 참사 200일을 맞아 여러 대학에서 유가족 간담회를 열었어요. 그러면서 많은 대학생을 만나 그 결실로 기본소득당 청년·대학생위원회가 탄생했습니다(위원장 윤김진서 당원). 회원 50명을 모으면 당내 의제기구를 만들 수 있는데 거의 100명을 모았어요. 청대위 운영위원 열 명 정도와 농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운영위원들이 각자 학교에서 대학생 농활 참가자를 모으고 있어요. 농활 이후 대학별 청대위 지부 설립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과거 학생운동은 주로 학생회 사이클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상황이 많이 달라진 지금 활동하는 주체들은 뭘 해야 하나 고민이 많을 거 같아요.
대학에 학생운동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갈증을 느끼는 청년들도 많아요.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들이 대학에 와서 시간적 여유가 생겨 뭔가 하고 싶은데 그럴 공간이 열리지 않으니 실망하곤 하죠. 만나면 다들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학교에 없다’고 얘기해요. 그래서 ‘그런 공간을 각 학교에서 직접 열어보자’고 청대위 회원들에게 제안했어요. 이런 제안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오히려 학내에 동료를 만들고 당원을 모아내고 싶다는 청년들도 많이 있더라고요.
생각이 달라도 설득하는 ‘노서영의 정치’를 하고 싶어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뽑히기 전엔 주로 여성 청년 당원들을 만나다가 이제 보다 다양한 당원을 만날 텐데 어떤 고민이 있나요? 서울시당으로서 어떤 사업을 하고 있나요?
이전까지 저를 닮은 사람들을 대변하면 된다고 생각하다가, 지금은 저와 많이 다른 사람들과 제가 아직 겪지 못한 삶을 어떻게 대변할지가 고민입니다. 제가 더 많이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저의 경험 부족 때문에 당원들이 저를 신뢰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요. 그런데 당원 사업에서 만나보면 당원들은 편견 없이 저를 대해주셨어요. 오히려 제가 편견이 있었다고 느꼈고, 저와 다르게 살아온 많은 분들과도 더 연결되고 싶어요. 서울시당 목표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의회에 진출하는 것입니다. 2025년까지 전략지역구 다섯 곳을 청대위 활동과 연계해서 만들고, 2026년까지 일곱 개로 넓히려고 해요. 서울 당원들과 《인커밍》 읽기도 추진하고 강연 사업도 할 계획입니다. ‘부메랑’이라는 이름의 서울시당 뉴스레터도 만들었습니다.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나선 것은 정치의 길을 진지하게 가겠다는 뜻일까요?
사실 정치인이 되려고 정당활동을 시작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지금 제가 잘 할 수 있고, 해내야 하는 역할이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에 서울시당 위원장에 출마했어요. 2026년 지방선거 때 우리 당이 서울시의회에 어떻게 진출할 수 있을지를 중심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 지도부를 뽑는 선거 중인데, 출마를 준비하고 있죠?
청년최고위원으로 출마할 예정입니다. 저는 조직 확대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당 지도부는 다음 선거까지 조직 확대를 크게 이뤄내야 합니다. 제가 해온 활동의 연장에서 이러한 조직 사업을 잘 추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이 조직을 확장하면서도 초심과 선명함을 잃지 않도록 제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끝으로, 노서영이 생각하는 정치는 어떤 건가요?
단지 여론이 이러하니 그냥 이대로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사회가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담론이나 정책을 가지고 대화하고 설득하는 정치입니다. 기본소득 정치가 바로 그런 것이겠죠. 많은 정치인들이 보편복지뿐 아니라 장애인권이나 페미니즘 같이 공론장에서 공격받는 의제를 회피하거나 혹은 혐오정서에 가담합니다. 표를 얻어야 하는 입장에서 제가 바라는 정치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설득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변화를 만들어내는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알찬 인터뷰 감사합니다.
좋은 아이디어 계속 내면서 품은 뜻을 펼쳐나가는 활동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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