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커밍」봄호 (기고 6) 독서생활자가 뽑은 다섯 키워드, 다섯 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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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활자가 뽑은 다섯 키워드, 다섯 권의 책
김민정
기본소득대구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대구여성주의그룹 나쁜페미니스트 활동가
당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대구 당원 김민정입니다. 지난해 읽은 책 중 몇 권을 올해의 독자들에게 추천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책을 매일 읽다 보니 인커밍에 책을 추천하는 글을 쓰는 날이 오는군요. 제 프로필에 적는 키워드인 ‘독서생활자’는 한 여행작가가 자신을 ‘여행생활자’라 부르는 걸 보고 떠올렸습니다. 그저 몇 페이지라도 매일 책을 읽는 나를 ‘독서생활자’라 부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지요.
청소년기를 생각하면 저는 책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타지에서 혼자 일하며 지낼 때,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잔뜩 빌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여행과 관련한 책을 무척 많이 읽었어요. 떠나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활하는 삶 가운데 외로움과 갈증이 쌓였던 때였습니다. 지독히 외로워 무언가를 먹듯 책을 보던 시절, 1년 동안 100권이 넘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시절이 지나 외로움이나 갈증은 빠져나갔는데 매일 책을 읽던 습관이 남았습니다. 저는 책을 사랑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독서생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프로필에는 ‘독서생활자’ 외에 ‘퀴어페미니스트’나 ‘아픈 몸’도 있습니다. 저를 표현하는 몇 가지의 정체성인데요. 그래서 소설 외에 주로 읽는 책은 퀴어페미니즘이나 돌봄과 관련된 책이 많습니다(기본소득 관련 책도 ‘열심히’라곤 못하겠지만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요즘 한국의 2030 여성 작가들의 소설은 기본 바탕이 퀴어하고 페미니즘적이어서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 좋습니다(저는 책 모임도 여러 개 하고 있습니다).
추천할 책을 고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어쩌면 협소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제게 좋았던 세계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키워드 하나 #올해의책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앨리슨 케이퍼 지음, 이명훈 옮김, 오월의봄)
말 그대로 ‘올해의 책’으로 추천합니다. 5백 페이지가 넘는, 가볍지 않은 책입니다. 하지만 책 모임 친구가 너무 좋다면서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저도 그 친구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읽다가 좋아서, 장애인 운동을 하는 동료 활동가와 HIV/AIDS 인권운동을 하는 동료 활동가에게 책이 좋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장애의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의 한계를 모두 비판하며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제안하는 이 책은 ‘교차성’ 키워드가 딱 들어맞는 퀴어페미니즘 책입니다. 또한 정상성 규범에 갇힌 비장애중심주의에 과감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장애학 책입니다. 이 책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을 찾아가게 합니다. 모든 억압은 언제나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합니다. 차별과 억압의 범주들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얽혀있고 서로에 의해 구성됩니다.
앨리슨 케이퍼는 ‘확장된 장애 운동’의 가능성에 페미니즘 인식론을, 반듯한 선 대신 ‘구부러진 일직선’ 같은 퀴어의 시간성을 녹였습니다. 그의 퀴어/페미니즘 이론은 제게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을 사유하는 힘을 주었습니다. 차이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횡단하고 연합을 형성하는 것은 두렵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직면하게 하면서, 횡단하는 연대의 장을 보여줄 것입니다.
키워드 둘 #침묵깨기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문학동네)
<모두의 페미니즘>;을 쓴 벨 훅스는 제가 좋아하는 여성학자이자 여성운동가입니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성차별, 그리고 성차별주의자들의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남성과 여성이란 단어를 넣지 않고도 명확하게 페미니즘의 정의와 갈 길을 제시하며, 성적 지향에 상관 없이 성차별에 반대한다면 모두가 페미니즘의 동료가 될 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저는 벨 훅스가 이야기하는 사랑과 연대를 놓지 않는 페미니즘을 좋아합니다.
벨 훅스의 이 책은 우리가 잘 이야기하지 않는 ‘계급’에 대해 집중하여 이야기합니다. 제가 계급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사회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가난이, 나의 부모의 가난이,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채감이 내 문제가 아니고 나만 감당할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삶을 살고 다른 곳에서 대안을 만들고 싶어서 사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가난만이 문제라는 생각을 넘어 페미니즘을 만났고, 다양한 관계를 만나면서 교차로에 선 연대의 얼굴을 알았습니다.
23년 전 벨 훅스의 글은 현재(2023년)도 낯설지 않습니다. 벨 훅스는 계급 없는 사회로의 변화를 만들고 싶다면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페미니스트로서 계급에 대해,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합니다. 벨 훅스는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는 수치심에 개입하는 행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각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균열을 내기 위해, 함께 ‘계급’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키워드 셋 #어떻게살것인가
<파견자들>;(김초엽 지음, 퍼블리온)
김초엽 작가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난 후 늘 그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매우 좋아하고요. 그러니 신간 <파견자들>;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SF 특유의 설정을 잘 이해하지 못해도, 영상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리듬감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자기 자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환상이라 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지상을 ‘범람체’에게 빼앗기고 지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지상은 처음부터 범람체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지막엔 인간과 범람체가 공존하는 ‘경계지역’이 형성됩니다. 지상과 지하의 분열과 적대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지만, 서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문장을 저는 완전히 긍정했습니다.
이 책에서 늪의 범람체들은 인간과 공존하자며 다른 지역의 범람체들을 하나하나 설득합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울고 말았는데요.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되돌아보았습니다. 기후위기 시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공간, 모든 생명, 모든 물질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 자스완은, 지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뭐냐는 질문을 듣자, 미소 지으며 대답합니다. “당신이 오직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키워드 넷 #기후시민
<기후위기 행동사전>;(김병권 외, 산현재)
저는 기본소득당의 당원이고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회원입니다. 기본소득대구네트워크 운영위원을 하며 대구에서 기본소득 의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2023년 하반기에는 기본소득대구네트워크에서 ‘비건책빵 고스란히’와 함께 “피난처에서 만나요”란 이름으로 독서모임을 했습니다. 불안이 가중되는 전 세계적 기후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기후위기 행동사전>;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행위로 인해 회복탄력성을 잃어가는 지구의 현재와 과거에 대해, 이대로 욕망을 멈추지 않고 살면 맞이할 슬픈 미래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다룹니다. 용어가 낯설거나 어려울 수 있지만, 사전이란 제목에 걸맞게 구체적인 정보를 전해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용어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지구의 회복력을 되찾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조력할지 이 책은 차근차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책감만 느끼면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행동이든 우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키워드 다섯 #모두의결혼
<오늘의 세리머니>;(조우리, 위즈덤하우스)
마지막 책은 동성결혼을 다룬 <오늘의 세리머니>;입니다. 조우리 작가는 전작에서도 퀴어, 여성, 연대를 다뤄왔습니다. 이 책의 뒤표지에 소설 속 이런 대사가 쓰여 있지요.
“50년을 함께 산 두 여자가 지금 당장 부부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저는 잘 압니다. 그래서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부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을 떠올리는 건 누군가에겐 쉬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생각조차 하기 어렵거나 그럴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결혼을 꿈꾸지 않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다릅니다. 결혼을 원하는 이들이 동성이란 이유로 혼인신고를 할 수 없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차별입니다. 결혼하고 싶거나 그렇지 않은, 혼자이거나 함께인 제 퀴어/레즈비언 친구들이 떠오르면서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혼인 평등을 다룬 이 소설이 나온 2023년에 한국 성소수자 운동 진영은 동성혼 법제화를 의제로 삼았습니다. “모두의 결혼, 사랑이 이길 때까지” 한국의 혼인 평등/동성혼 법제화 실현을 위한 캠페인 문구입니다. 이 운동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혼인평등연대’가 함께 합니다. 이 싸움이 꼭 이기길 바랍니다. 결혼하고 싶고 가정을 바라는 레즈비언 친구들, 동성 커플이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선택이 제도와 혐오차별에 가로막혀 좌절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세리머니’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되지 않는 내일을 꿈꿉니다.
제가 책에서 만난 빛나는 세계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가슴에 가 닿아 우리 세계가 어느 날 짠! 하고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매일 읽는 삶으로 여정을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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